우리나라 기업들은 유난히 두 글자 영문 이니셜 기업 명칭을 선호합니다. 특히 전통있는 두글자 한자(漢字) 사명을 사용하던 기업이 두 글자 영문 이니셜 사명으로 변경하는 사례가 많은데요,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 글로벌화 : 한국어 중 일부 자음과 모음은 외국인에게 있어 발음과 표기가 어려운 편입니다. 또 우리말로는 좋은 뜻이지만 영어 발음 상 부정적인 의미를 갖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제일'이라는 단어가 그렇죠) 그래서 기존 이름과 연계성을 지니면서 외국인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영어 이니셜 네임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것 같아요.
- 계열사 확장 용이 : 우리나라 기업 경영에서 유난히 많이 보이는 것이 '그룹화' 경향입니다. 인수합병을 하든 신규 사업에 진출하든, 기본적으로 대표 그룹 브랜드 중심의 일원화 전략을 채택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간단한 두 글자 영문 이니셜은 뒤에 어떤 계열사 이름을 붙이더라도 무난하게 어울리죠. 또 짧은 이름을 선호하는 우리나라 사람에게 최선의 대안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 상표권 확보 : 브랜드가 넘쳐나는 시대에 신규 네임으로 상표권을 확보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특히 글로벌 상표권 확보는 상표 등록 가능성 검토(주의! 출원등록이 아닙니다)에만 수천만원의 비용과 수개월의 기간이 소요되는데요, 대부분이 엄청난 비용을 쏟고도 원하는 국가 및 상품류에 모두 등록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습니다. 두글자 영문 이니셜 네임은 식별력이 없는 네임으로서, 기본적으로 이름만으로는 상표등록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고유한 디자인과 결합하여 차별성을 만들어내면 디자인 상표로서 등록을 받을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디자인에 막중한 책임을 넘기는 폭탄돌리기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네임 개발 대비 상대적으로 용이하기에 많이 채택되고 있습니다.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최근 자주 보이는 새로운 사명 전략을 설명드릴께요.
그것은 바로, 기존 사용하던 국문 사명에 영문 이니셜 네임을 추가하여 함께 나란히 적는 것입니다. 최근 사명 변경 사례를 통해 살펴보도록 해요.
1. 현대이지만, 현대가 아닙니다 : HD현대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HD현대입니다. 현대중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기업 집단으로서, 원래 "현대중공업 그룹"이라고 불리어왔는데요, '중공업'이란 업종표기어가 그룹의 사업영역 대표 및 확장에 제한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중공업'만 떼자니,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는 무수히 많은 "현대" 브랜드를 사용하는 기업이 있죠.
물론 선행 범현대 그룹사들처럼 같은 이름을 사용하되 로고 디자인에서 차별화를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는 항상 부연 설명이 붙게 돼요. '자동차' 또는 '백화점' 같은 대표 업종을 덧붙여 구분을 해줘야 하죠. 모든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이 100% 로고와 함께 이뤄지는 것은 아니기에, 같은 이름을 사용할 경우 이런 번거로움은 감내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HD현대는 영문이니셜을 함께 사용함으로서 다른 "현대"들과 언어적, 시각적 차별화를 만들어냈어요. 비록 "HD" 또는 "현대"만 단독 사용하는 것보다는 이름이 길어지지만, 부연설명을 해주는 것보다 훨씬 명확하지 않나요? 또 대표 업종이 자꾸 회자되어 기업 브랜드의 사업 영역이 한정되는 문제도 줄어들고요.
2. 형제의 난으로 분리구분 I : HS효성
효성 그룹의 '형제의 난'은 꽤 오래 화제가 되었죠. 그런데 최근 형제가 각각 분리하는 것으로 정리된 모양새입니다.
기존 효성 브랜드 외에 새롭게 HS효성 브랜드가 탄생했는데요, HD현대와 맥락을 같이하는 사명 전략이 아닐까 합니다.
참고. 위 HS효성의 CI 디자인은 2024년 8월 현재 공식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KIPRIS 상표 출원으로 미뤄보아 HS효성의 새로운 CI로 추측되는 디자인입니다.
3. 형제의 난으로 분리구분 II : HS화성 / HXD화성개발
화성산업은 대구 지역의 대표 건설사입니다. 앞서 설명드린 효성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역시나 '형제의 난'으로 종종 언론에 언급되었습니다. 최근 변경된 CI 디자인은 '형제의 난'이 어느정도 해결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두 회사 모두 잇달아 사명을 바꿨네요.
4. 이니셜 브랜드로 변화하기 위한 과도기 전략 : DS단석
단석산업은 정밀화학 및 친환경 리사이클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입니다. 최근 34년만에 DS단석으로 사명을 바꾸었는데요, 위 사례와는 다른 이유와 목적으로 변경한 것으로 보입니다.
"단석"이라는 이름은 한자로 丹石, 즉 붉은 돌 마노석을 뜻하는데요, 우리나라 한자 사명 중에서는 나름 독특한 사명입니다. 비록 "단석"이 차별화도 되고 글자수도 길지 않은 네임입니다만, 더 쉽고 짧은 이름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SK로 바꾼 선경, CJ로 바꾼 제일제당과 같은 유명 재벌기업이자 소비재 브랜드와 달리 "단석"의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낮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단석에서 DS로 바로 변경 시, 기존 단석산업에 익숙했던 고객들이 낯설어할 수 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B2B산업 기업으로서 신규사명 홍보를 위해 막대한 광고선전비를 지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DS단석은 새로운 영문 이니셜 브랜드 DS와 기존 브랜드 "단석"과의 연결고리를 지어주기 위한 과도기 전략으로 볼 수 있습니다. 평소 DS와 단석을 함께 쓰고, 함께 노출하면서 "DS=단석" 임을 인지시키는 것이죠. 물론 단기간에 바로 인지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소 10년은 사용해야하지 않을까 싶네요.
5. 기존 이니셜 브랜드와 차별화를 위한 전략 : SJG세종
세종공업은 자동차 부품 제조 기업입니다. 기존에 "세종그룹"으로 불리어왔는데요, 사업 및 기업 이미지 변화를 꾀하면서 SJG세종으로 사명을 변경했습니다.
사실 "세종"의 영문 이니셜은 SJ입니다. 그런데 SJ는 패션기업 SJ그룹이 선점하고 있었어요. 세종공업 역시 B2B산업 기업으로서 소비재인 SJ그룹 대비 인지도가 낮을 수 밖에 없죠. 그렇다고 "세종"을 쓰자니, 전국에 "세종"을 사명으로 사용하는 기업이 너무나 많은 것이죠. 그래서 절충안으로 세종그룹의 이니셜인 SJG와 세종을 함께 표기하는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그룹 명칭도 SJG 그룹으로 변화하게 되었는데요, 잠깐 그룹이 두번 중복되는 것 아니냐고요? G는 '그룹'외에도 '글로벌'이라는 굉장히 좋은 단어의 이니셜이기도 합니다.
6. 번외 I. - 기업 전문성을 표현하기 위한 전략 : EV수성
수성이노베이션은 소형 운반장비 기업인데요, 최근 상용 전기차 시장 진출을 선언하며 EV수성으로 사명을 변경했습니다. 앞선 사례들의 기존 사명 이니셜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업종 대표 키워드를 사용한 점이 특이합니다. 또 일반적으로 업종 대표 키워드는 기존 사명 뒤에 붙이는데요, 앞에 붙인 것도 특이합니다.
CI 디자인을 통해 유추해 보건대 향후 EVS라는 브랜드로 변경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네요.
7. 번외 II. - 사명은 바꾸지 않고 CI 디자인에만 표기 : 경동제약
경동제약은 진통제 브랜드 '그날엔'으로 알려진 제약회사입니다. 최근 새로운 건기식 브랜드를 런칭하며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있어요. 기업 이미지 변신을 위해 CI를 리뉴얼했는데요, 새로운 심볼과 함께 KD라고 영문 이니셜을 표기한 것이 특이합니다. 공식 사명은 여전히 경동제약입니다.
추측건대, 경동제약은 CI디자인으로만 KD 브랜드를 노출시켜 익숙하게 하고 향후 바로 KD제약 또는 KD그룹으로의 변화를 꾀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명을 변경하는 것과 비교하면 다소 소극적인 전략이라고 할 수 있죠.
왜 영문 이니셜과 국문을 함께 표기해야 하는가?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살펴본 영문 병기 사명 변화 전략,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정리했습니다.
- 차별화 : 우리나라에서 두글자 한자 사명은 매우 보편적입니다. 스타트업이 아닌 어느정도 역사가 있는 기업은 대부분 한자 사명이죠. 그렇기에 전국에 동일한 이름의 기업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삼성, 현대처럼 크고 유명한 기업이 아닌 이상, 두 글자의 한자 이름 브랜드를 선점하기란 쉽지 않죠. 사례에서 살펴봤듯이 CI 디자인으로 차별화하는 방법도 가능합니다만, 디자인 경영이 익숙하지 않은 기업으로서는 복잡하하고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고, 또 언어적 차별화보다는 효과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예요.
- 영문 이니셜 브랜드로 자연스러운 변화 : 브랜드 변경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네임 변경은 새로운 네임을 인지시키기 위해 막대한 홍보비용과 오랜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어요. 영문 이니셜을 병기하는 전략은 과도기적 형태를 취함으로써 자연스러운 브랜드 인지 변화를 유도할 수 있습니다.
- 정통성 계승 : 이는 위 사례 중 특히 '형제의 난'으로 인한 분리독립 기업에 해당하는 이유입니다. 비록 모기업에서 떨어져 나왔지만 정통성과 명분은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어요.
영문 이니셜 브랜드의 한계, 그에 대한 보완책
비록 대한민국 기업들이 두 글자 영문 이니셜 네임으로 사명 변경을 매우 선호한다고 말씀드렸지만,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비효율적인 사명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위 이미지의 4개 기업은 최근 영문 이니셜 네임으로 변경한 기업인데요, 여러분은 원래 기업 브랜드를 바로 유추하실 수 있나요?
- HY는 사명 변경한지 3년이 넘었음에도 아직까지 괄호를 치고 한국야쿠르트라고 표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 HC는 해피콜 브랜드를 같이 써주지 않으면 아마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 TP는 비록 최근에 변경했지만, 이 네임과 태평양물산을 연결시키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여러분 중 왜 TPY가 아니야? 라고 생각하시는 분 없나요?)
- HL은 과감히 그룹명칭을 바꿨지만, 복잡하고 어려운 계열사 이름 - "HL디앤아이한라"를 보면 HL과 한라를 연결짓기 어려워한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두글자 이니셜은 식별력이 없는 네임입니다. 즉, 누구나 사용할 수 있고 원래의 의미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뜻이죠.
두글자 이니셜 브랜드가 고유한 브랜드로서 소비자에게 각인되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빈번한 노출(이라 쓰고 막대한 광고홍보비라고 읽습니다)이 필요하죠. 과거 선경이 SK로 네임을 변경했을 때 대대적인 광고를 진행했었습니다. TV와 신문이라는 대중매체가 있던 시절에는 광고를 통해 브랜드 변화를 알리기가 상대적으로 쉬웠습니다. 하지만 대중매체가 쇠락하고 SNS 및 유튜브와 같은 새로운 미디어 채널이 보편화된 지금, 새로운 브랜드를 인지시키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필요로 합니다.
브랜딩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요? 고유의 브랜드 이미지와 인지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닌가요? 비록 이니셜 사명 변경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얻을 수 있지만, 기존 축적된 인지도를 버린다는 것은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하는 신생 브랜드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또, 영문 이니셜 사명은 결국 중복되는 네임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위 사례에 있는 효성과 화성 모두 영문 이니셜은 HS입니다. 우리 회사의 이니셜 네임이 다른 회사에 의해 이미 선점되었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점 회사를 의식하며 디자인 차별화를 꾀해야 할까요, 아니면 우리 회사가 최고야라는 자신감으로 당당히 밀어붙여야 할까요? 아니면 누구도 선점하지 않은 이니셜 두글자를 찾아 고민해야 할까요?
그렇기에 새로운 영문 이니셜 네임과 기존 국문 네임을 함께 쓰는 것은 효율적이고 스마트한 사명 변경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단, 네임의 길이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