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옛날 포도주를 담아 보관하던 가죽 주머니(부대)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요, 이 가죽이라는 소재의 물성이 처음에는 말랑말랑하지만 술과 같은 액체를 접하게 되면 딱딱하게 변하게 되죠. 따라서 새 포도주를 딱딱하게 변해버린 옛 가죽 주머니에 담으면 술이 발효되면서 나오는 가스를 견뎌내지 못하고 터져 버릴 수 밖에 없기에 반드시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브랜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업 또는 브랜드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타개하기 위한 강력한 변화가 바로 “새 부대” 즉, 새로운 브랜드 네임으로 변화하는 것인데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말이 가장 적합한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존 브랜드를 계속 활용할 경우 쌓아온 인지도와 이미지를 연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미 어느정도 굳어진 틀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근 새 부대가 아닌 기존에 사용했던 옛 부대를 다시 꺼내 사용하는 브랜딩 사례들이 눈에 띄고 있습니다. 사례가 많지는 않지만, 왜 그들이 그런 선택을 내리게 되었는지, 또 장점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아요.
1. 13년 만의 부활, 액티언
액티언은 2005년 탄생한 쌍용자동차의 쿠페형 SUV 브랜드입니다. 2011년 단종되었는데요, 최근 새로운 디자인으로 부활했습니다.
비록 액티언이 6년 만에 단종된 비운의 브랜드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브랜드 네임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저에게 SUV 브랜드 네임을 개발하라고 한다면, 솔직히 액티언보다 더 좋은 네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쉽고 명확하며, 상표권까지 확보된 훌륭한 네임입니다.
KGM이 액티언을 다시 사용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번에 주인과 이름이 바뀌긴 했지만 KGM은 여전히 경영난을 겪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브랜드의 SUV를 출시하자니 새로운 브랜드 네임 개발에 소요되는 비용과 시간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잠깐, 여기에서 브랜드 네임 개발 비용이 매우 비싸다고 오해할 수 있는데요, 사실 네임 개발 자체 비용은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비싼 것은 바로 상표권 확보 비용입니다. 특히 글로벌 브랜드로 개발할 경우 상표등록 가능성 확인 및 출원등록에 드는 비용과 시간이 어마어마하죠.
한시라도 빨리 신차를 출시하여 매출을 발생하게 하고픈 KGM 입장에서는 이미 상표권이 확보된 단종 브랜드를 부활시키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또, 이미 쌍용자동차에서 KG 모빌리티로 기업 브랜드를 변경했다가, Cage(새장)이 연상된다는 이유로 다시 KGM으로 변경해야만 했던 쓰라린 경험이 아마도 주저없이 이미 검증된 안전한 브랜드 네임을 선택하게 했을 것입니다.
2.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Zellers
Zellers는 캐나다의 할인형 마트 브랜드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매우 생소하지만 캐나다인에게는 거의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친숙한 국민 브랜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치열한 유통 브랜드들의 경쟁 속에 쇠락하며 결국 2013년, 미국 브랜드인 Target에게, 또 일부는 Walmart에 매각되며 사라졌습니다. 참고로 Zellers를 인수하며 공격적으로 캐나다 진출을 꾀했던 Target은 2년만에 실패했다고 해요.
2023년에 부활한 Zellers는 과거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었습니다. Hudson’s Bay 백화점 내 Shop-in-Shop 및 온라인 쇼핑몰로 오픈했는데요, Zellers의 인지도와 과거에 대한 향수를 활용한 PB(Private Brand)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Zellers의 부활은 최근 뉴트로 트렌드의 영향도 있을 것이고, 상표권 유지 문제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북미의 상표권은 일정 기간 사용하지 않으면 취소될 위험이 있는데요, 이는 미국 햄버거 브랜드 In-N-Out이 3년마다 우리나라에서 팝업스토어를 여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최근 이 상표권의 틈새를 노린 Zellers 상표 도용 이슈가 있었다고 하네요. 캐나다에서 워낙 Zellers의 인지도가 높기에 당연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3. 아울렛에서 복합쇼핑몰 브랜드로 변신, 타임빌라스
타임빌라스는 2021년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 의왕점의 이름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사용되고 있고요. 그런데 수원 스타필드 개장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롯데백화점이 2024년 수원점을 리뉴얼하면서 이 브랜드 네임을 새로운 카드로 꺼내들게 되었습니다.
브랜드 전략 관점에서 바라보면 솔직히 바람직한 전략은 아닙니다. 아무리 프리미엄이라고 해도 아울렛과 최근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는 복합쇼핑몰의 이미지는 큰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고, 기존 아울렛 브랜드에 익숙한 고객에게는 혼선을 야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데백화점이 기존 이름을 사용하게 된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새로운 브랜드 네임을 개발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롯데백화점 수원점의 리뉴얼이 급박하게 진행되었을 가능성, 그리고 최종 의사 결정자가 ‘타임 빌라스’라는 네임에 개인적으로 큰 호감도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타임빌라스라는 브랜드 네임이 롯데백화점의 미래와 변화를 상징하는 브랜드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타임’이라는 키워드는 동종업계인 경방백화점이 이미 선점한 키워드이기 때문입니다. 2009년 오픈한 영등포의 ‘타임스퀘어’를 비롯하여 ‘타임스트림’ ‘타임테라스’ 등을 운영하면서 ‘타임’이라는 키워드를 고유한 브랜드 자산으로 구축하고 있습니다. 비록 롯데백화점과 비교하면 규모나 인지도가 작은 편이지만 꽤 오랫동안 꾸준히 브랜드 이미지를 쌓아온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롯데백화점의 브랜드 파워로 충분히 타사 브랜드 이미지와의 중첩을 극복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자신감으로 봐야할지 자만심으로 봐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4. 패션 브랜드에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29에디션
29에디션은 온라인 편집숍 29센치가 런칭한 라이프스타일 제품 브랜드입니다. 그런데 archiveB를 등록하기 위해 검색을 했더니 이미 2020년에 동일 브랜드 네임의 29센치 단독 패션 상품 브랜드로서 런칭을 했었더라고요. ‘에디션 Edition’이라는 네임은 PB 브랜드에 가장 적합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데요, 문제는 어디에나 붙여도 무난하게 잘 어울리기에 또렷한 개성은 갖기 어려운 단점이 있습니다.
29에디션 역시 패션 브랜드에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변신했지만, 사실 저 같은 브랜딩 종사자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나중에 식품 브랜드로 변신하더라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것 같네요. 29센치만의 특별함과 개성을 한 스푼 더 추가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이상으로 국내외의 브랜드 부활 사례를 간단하게 살펴봤습니다.
과거 사용했던 브랜드 네임을 다시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개발 비용 절감 : 브랜드 상표권이 이미 확보되어 새롭게 개발하는 것 대비 노력과 비용, 시간을 대폭 절감할 수 있다.
2. 홍보 비용 절감 : 신규 브랜드 네임 대비 상대적으로 훨씬 높은 인지도를 확보할 수 있다.
3. 익숙함과 친근한 이미지 :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켜 친근한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함께 치명적 단점도 있습니다. 바로 "과거에 성공하지 못했던 브랜드"라는 낙인을 단 채로 시작하게 된다는 것인데요, 과거에 실패했을지라도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시킬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클라이언트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는 비단 고객 뿐 아니라 브랜드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도 은연중에 큰 영향을 끼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이번 글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최근 뉴트로 열풍에 힘입어 부활한 추억의 패션 브랜드들이 꽤 많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을 재현한 브랜드는 아직까지 눈에 띄지 않고 있어요.
브랜드 재활용이 아닌 진정한 “브랜드 부활”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네임을 가져다 쓰는 것을 넘어,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브랜딩이 반드시 함께 수반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