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의 타이틀은 소셜 미디어에서 보고 인상깊어서 메모해 놓았던 문구로 작성해 보았습니다.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브랜딩에 위험을 감수하세요.혁신은 그것을 요구합니다."라는 뜻이예요. 리스크 없이 혁신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뜻이죠.
원래 오리지널 문구는 "Take risks in design; innovation demands it." 이었는데요, 아시다시피 네이미스트 출신인 저는 브랜드 네임도 이에 해당된다고 생각하여, design을 좀 더 큰 개념인 branding으로 변경했어요. 안타깝게도 출처는 깜박하고 기록해놓지 않았어요. 이름모를 원작자님께 죄송하고 또 감사하단 말씀 드리고 싶네요.
브랜딩에서 혁신은 무엇일까요?
혁신의 정의는 개인 별로 달라질 수 있어요. 브랜딩 프로젝트는 항상 클라이언트 인터뷰로 시작하는데요, 대부분의 클라이언트가 "우리 브랜드는 혁신적이다"라고 말씀하세요. 그런데 그 말을 듣고 파격적인 네임이나 디자인을 후보안으로 들고 가면, 또 대부분이 "우리의 혁신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다"라고 반응하시죠. 시작할 때는 완전히 변한 새로운 모습을 꿈꾸지만, 의사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는 보수적인 태도가 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또 일부 브랜딩 사례들을 보면 브랜드의 정체성과 동떨어진 생뚱맞은 네임이나 디자인이 간혹 있는데요, 이는 혁신을 "기존에 없던 완전한 새로움"이라 생각하고 맹목적으로 차별화를 추구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대부분 얼마 안가 리브랜딩을 하게 되더라고요. 지금 당장 차별화를 이루더라도 소비자에게 외면받는다면, 과연 혁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브랜드비가 생각하는 브랜딩에서의 혁신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 혁신은 상대적이다, 차별화의 기준을 세워두어야 한다.
흔히들 혁신의 아이콘으로 애플의 '아이폰'의 사례를 들곤 하는데요, 사실 아이폰이 아이디어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전에 없던 새로움"은 아니예요. 하지만 경쟁사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을 때 과감하게 상용화한 점이 많은 사람들에게 혁신으로서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해요. 브랜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브랜드가 넘쳐나는 지금, 기존에 없던 새로운 브랜드와 디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과거 어느 순간, 전 세계 어딘가에 유사한 브랜드가 존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저 지금 알지 못하는 것 뿐이죠. 또 이러한 정보는 개개인의 경험과 관심도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어요. 그렇기에 새로움과 차별화를 판단할 기준을 세워놔야 합니다. 이는 경쟁사일 수도 있고, 소비자의 연령대나 라이프스타일 수도 있습니다.
2. 제품이나 서비스의 속성과 최소한의 연결고리는 지녀야 한다.
영어 단어로 표현하면 Relevance, 즉 연관성 또는 적절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새롭고 신선한 브랜드라도 소비자가 제품이나 서비스와 연관짓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일까요? 특이한 브랜드로 기억만 하고 정작 구매나 사용은 하지 않는다면 브랜딩을 한 의미가 있을까요? 대표적인 사례로 지금은 사업종료한 랄라블라 브랜드를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관련 글 읽어보기 : 랄라블라는 왜 실패했을까)
3. 일관성있고 지속적인 사용이 필요하다.
아카이브B를 업데이트하면서 간혹 유난히 자주 리브랜딩을 자주 하는 브랜드들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브랜딩 후 매출이 생각만큼 잘 나오지 않아 그 타개책으로 리브랜딩을 하는 것이라 추측되는데요, 그 중에는 꽤 훌륭한 브랜딩 사례도 있었습니다. 브랜드가 파격적이면 파격적일 수록 소비자가 이를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해요. 모든 소비자가 혁신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좋아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은 반드시 접어야 합니다. 아이폰 출시 후에도 한동안 휴대폰 시장 점유율 1위는 피처폰의 대명사 노키아였죠. 그래서 LG는 스마트폰이 대세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오판을 내리기도 했고요. 기업이나 사업부의 생존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단기간 매출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만, 정말 혁신적인 브랜드를 원했다면 즉각적 반응없이도 꾸준히 고유의 브랜드이미지를 고수해나갈 의지와 기반을 마련해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브랜딩에서 리스크는 무엇일까요?
이 역시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습니다만, 브랜드비가 그동안 브랜딩 프로젝트를 수행해온 경험에 미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어요. 많은 클라이언트 분들이 파격적인 네임이나 디자인을 보고 했던 반응이기도 해요.
1. 그동안 우리 회사가 해왔던 모습과 너무 달라요.
2. 우리 업계에서 이런 이미지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요.
3. 기능성에 문제가 있을 것 같고 또 활용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이에 대한 설명은 이어지는 리스크를 무릅쓴 브랜딩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대표 브랜딩 사례는 브랜드비 주관적으로 선정했으며, ABC 및 가나다 순으로 정리했어요. 일부 사례는 브랜드비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소개했던 사례라 친숙하실 것이예요. (잠깐 광고: 혹시 브랜드비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지 않으시다면 바로 클릭해서 팔로우 해주세요. 알찬 브랜딩 정보가 매일-공휴일 제외 업데이트됩니다.)
1. Global Commons Aliance
Global Commons Alliance는 환경 관련 NGO입니다. 요즘 기후위기 이슈가 워낙 대두화되고 있다보니, 기존에 있던 환경 단체 외에도 신규 단체 및 관련 기업들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예요. Global Commons Alliance가 기존에 사용했던 로고는 차별화가 전혀 되지 않는 무미건조한 디자인이었죠.
새로운 디자인은 환경보호의 궁극적 목표인 지켜나가야 할 자연의 구성 요소들을 일러스트로 시각화했어요. 일반적인 클라이언트의 반응이 예상되시죠?
"생물 이미지가 너무 복잡해서 작은 사이즈에 적용하기 힘들어요."
"구성 요소가 너무 많아서 복잡하고 활용하기 어려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디자인을 선택한 것은 명확한 차별화와 Global Commons Alliance의 지향점을 담고 있기 때문이예요. 사용성 및 활용성의 문제는 적절한 디자인 시스템 개발로 해결할 수 있어요. 브랜딩 에이전시 Johnson Banks가 이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확인해 보세요.
2. Made for Med
MadeForMed는 진료 예약 및 의료 소통을 위한 앱 서비스입니다. 로고 디자인은 악필로 유명한 의사의 필기체를 표현했는데요, 이를 통해 의사를 위한 서비스, 의사와 환자를 연결하고 소통을 도와주는 서비스라는 정체성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필을 컨셉으로 했으니 당연하게 로고의 가독성은 제로일 수 밖에 없어요. 하지만 서비스의 핵심 어플리케이션인 앱 아이콘은 항상 하단에 브랜드 네임이 함께 표기되기에 굳이 로고가 정확하게 읽혀야 할 필요성은 없는 것이죠.
COVID19를 계기로 다양한 원격진료 및 헬스케어 브랜드들이 출시되고 있는데요, 대부분 비슷비슷한 컨셉과 형상을 띄고 있었어요. MadeForMed의 브랜딩은 그 중에서 독보적으로 차별화되고 기억에 남는 사례입니다.
3. No.24
이 브랜드 네임을 들으면 어떤 업종이 연상되시나요?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아마도 No.24의 업종인 부동산 중개업을 떠올리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사람의 성씨를 회사 이름에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 서양문화에서는 굉장히 독특한 네임이라고 해요. 창업자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면서 가장 자주 접하는 매물의 번지 수와 사업을 시작한 년도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올해 설립한 따끈따끈한 회사예요.) 또 숫자 24는 하루를 이루는 시간이자, 동양문화권에서는 24절기를 의미하기도 하죠. 로고 디자인은 No.24가 다루는 매물의 특성인 역사와 문화를 지닌 주택의 타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무척 생뚱맞은 브랜딩이라고 생각했는데, 스토리를 듣고 보니 매우 납득이 가더라고요.
독특한 네임과 로고 디자인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No.24의 부동산 중개 서비스는 기존 회사들과 좀 달라요. 고객이 맡긴 매물의 상태를 최적으로 유지관리하고, 전문 사진 작가가 촬영한 멋진 사진과 상세한 소개 자료를 통해 구매자의 관심을 유도합니다.
4. Sock
처음에 이 브랜드를 보고 도대체 무슨 서비스인지 전혀 유추할 수가 없었어요. 아마 제가 동양문화권의 토종 한국인이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예요. Sock은 영국의 가상화폐 거래소인데요, 브랜드 네임은 서양인들이 예로부터 양말 속에 돈을 보관해온 것에서 유래했다고 해요. 가상화폐와 관련된 서비스인만큼 간접적으로 돈과 연관된 네임을 선택했고, 무형의 자산인 가상화폐의 낯설음과 불안함을 해소해기 위해 귀엽고 친근한 양말 캐릭터를 도입했습니다. 대부분의 가상화폐 거래소들이 기술 속성인 디지털과 블록체인을 이야기하며 차갑고 딱딱하며, 퓨처리스틱한 IT 서비스 이미지를 고수하는 반면 Sock은 쉽고 편리한 젊은 자산거래 방법로서의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어요.
"우리 업계에서는 아무도 이런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더 매력적이고 써 보고 싶지 않나요? 특히 지금까지 코인 거래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못한) 기술치인 저는 더욱 그랬습니다.
5. Stella Artois
해외 브랜딩 에이전시와 협업을 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요, 서양인들은 한자문화권의 세로쓰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 디자이너가 세로형 간판에 영어를 한글자 한글자 씩 세로쓰기한 것을 보고 서양인은 아무도 읽지 못하는 간판 디자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들에게 있어 올바른 세로형 간판 디자인은 위의 Stella Artois의 로고처럼, 먼저 가로로 쓰고 90도로 회전해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 역시 서양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형태라고 했어요.
그렇기에 모든 맥주 캔에 쓰인 로고가 가로로 적용된 것은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비록 세로쓰기를 했을 때 공간 활용성이 훨씬 뛰어나더라도 말이죠. Stella Artois의 리브랜딩은 이런 고정관념을 깬 새로운 시도입니다. 아마 서양문화권에서는 낯설고 읽기 어렵다며 불평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스마트한 솔루션이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Stella Artois의 브랜드 네임이 너무 길어 가로로 쓰면 크기가 작아질 수 밖에 없거든요. (우리나라 맥주 브랜드 네임이 짧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나란히 두면 상대적으로 네임이 긴 클라우드 맥주 로고가 매우 작아 보여요.) 오랜 역사를 지닌 브랜드이기에 Stella Artois의 이름을 읽지 못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무조건 눈에 띄게 크게 로고를 배치해야 하지 않을까요?
6. NH카드 지금 - 고향으로
현대카드 이후로 아름답게 디자인된 카드 플레이트는 너무나 당연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디자인되어 출시되는 카드들을 보아도 별다른 흥미가 생기지 않았었는데요, NH카드의 고향으로 카드를 보았을 땐, 어디서 디자인했을까 저절로 궁금해지더라고요.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지금.이라는 브랜드는 일단 무시하기로 하고요, 신용카드를 사용함으로써 고향에 기부를 한다는 취지를 감성적이면서도 담담하게 표현한 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특히 보수적이고 촌스러운 디자인이 보편적인 NH농협 계열의 브랜드답지 않게 너무 세련되었던 것이 놀라웠죠.
그 딱딱하고 꽉막힌 조직을 어떻게 설득했을까? 좋은 디자인은 그 자체로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는 것일까?
고향으로 카드 디자인은 경쟁사와 차별화에 성공하기도 했지만, 보수적인 조직 내에서 탄생한 혁신적 디자인 사례이기에 더욱 의미있다고 생각해요.
7. 1943 밀양딸기
밀양딸기1943 역시 로고를 처음 보았을 때, 기존에 봐왔던 농산물 브랜드와 완전히 달라서 기억에 남았어요. 식품 산업이 보수적이지만, 그 중에서도 농산물은 특히나 더 보수적이거든요. 20년 전 농산물 브랜드 로고와 지금의 농산물 브랜드 로고 디자인이 큰 차이가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요즘은 젊은 농부, 젊은 유통자들이 독립 브랜드를 출시하면서 많이 개선되었지만, 지자체나 협동조합과 같은 단체는 여전히 보수적이예요. 그런데 그런 보수적인 단체 중 하나인 밀양시가 이렇게 젊은 디자인을 선택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죠. 밀양딸기1943은 리브랜딩 후 백화점에도 입점하고 팝업 스토어도 여는 등 활발할 마케팅을 하고 있어요. 물론 전통적 스타일의 농산물 로고 디자인이었어도 동일한 마케팅은 할 수 있겠지만 아마 시너지는 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산업에서의 혁신은 상대적으로 쉽게 이룰 수 있지만, 최종 의사결정자 설득이 어려워서 의외로 어려운데요, 밀양딸기1943을 본보기로 우리나라 공공 농산물 브랜드 디자인이 진화 발전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8. 호암 미술관
삼성 그룹이 운영하는 미술관 중 하나인 호암 미술관은 다른 미술관 리움의 유명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는데요, 이름도 그렇고 건축물도 기와집 형태라 전통 박물관 내지 고전적인 미술관의 이미지가 강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건축물 리노베이션과 함께 진행된 리브랜딩은 기존 이미지와 정 반대의 컨템포러리 미술관 이미지로 재탄생했습니다. 리움 미술관과 형제 미술관으로서 현대적인 이미지를 가져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과제였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호암 미술관의 로고가 리움 미술관보다 더 파격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디자이너가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디지털 픽셀을 연상하게 하는 형태와 가독성을 후순위에 둔 조형미가 그 이유일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저는 옛날사람인지라 호암 미술관의 혁신을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는데요, 호암 미술관의 지향점과 변화 의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어요. 부디 이 디자인이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
이상으로 리스크를 무릅쓴 혁신적 브랜딩 사례들을 살펴봤어요. 브랜드의 맥락을 모른 채로 단순히 네임과 디자인만 보았을 땐 "이게 어디가 혁신이야?"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혁신은 상대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만약 브랜딩 에이전시들이 일반적인 클라이언트의 반응을 염두에 두고 브랜딩의 한계를 예단했다면, 이 브랜딩 사례들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예요. 어디서나 있을법한, 어디선가 봤음직한 브랜드들 중 하나로 남았겠죠.
또, 당연한 이야기지만 혁신적인 브랜딩은 무난하고 보편적인 브랜딩보다 설득과정이 어렵고 힘들 수 밖에 없어요. 이 점도 에이전시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리스크 중 하나이죠. 그렇기에 더욱 브랜딩에서의 새로운 시도는 마땅히 칭찬받고 존경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