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외장 하드를 정리하다가 무려 10년 전에 정리한 파일을 하나 발견했어요. 당시 무척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다시 보니 어찌나 새로운지요...
Typeface, 즉 서체의 세계는 서당개 10여년 풍월로도 따라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기왕 정리한 것, 기억을 더듬으며 기본 내용을 브랜드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내용은 당시 제가 공부했던 영문 서체에 관한 책을 기반으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한글 서체에 대한 지식은 더 얄팍해서, 나중에 좀 더 공부해서 공유드릴께요.
*주의! 본의 아니게 어려운 영어 단어 및 이름이 많이 등장합니다. 정식 발음을 모르기에 모두 영어로 표기했어요. 따라서 쉽게 읽히지는 않을 것 같아요. 대략적인 흐름을 이해하시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1.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개
10여년 전 일입니다. 당시 저는 네이미스트에서 디자인 기획자로 전환한지 3-4년 차 정도였는데요, 당시 재직하던 회사가 해외 에이전시와 협업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비록 제 전공이 '디자인'이지만 주로 제품 디자인, 웹 디자인 중심으로 수업이 이뤄졌던지라 그래픽 디자인, 특히 서체 디자인은 문외한이나 다름 없었죠. 관련 책도 몇 권 읽어봤는데, 생소한 용어들의 나열에 머리속에 잘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특히 어떤 서체가 브랜드 아이덴티티에 적합한지 판단하는 기준을 알고 싶었는데, 아무도 알려주지 않더라고요.
혹시 여러분은 왜 Serif 서체는 'Claasic'하다고 말하는지, 또 Sans-serif는 왜 'Modern'하다고 말하는지 이유를 알고 있나요?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또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 아래 책을 추천드립니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절판되었는데요, 아마존 중고 서점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는, 서체에 대한 백과 사전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은 책입니다. 당시 어떻게 제가 이 두꺼운 책을 읽어냈는지 지금 생각하면 미스테리입니다만, 덕분에 브랜딩 프로젝트를 매니징할 때 디자이너들에게 꿀리지 않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 같아요. '나는 이렇게 두꺼운 책도 읽은 사람이라고!' 라며 말이죠. (물론 전문 서체 디자이너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Letter Fountain은 다양한 서체에 대해 역사와 함께 설명하고 있어서 비교적 이해하기 쉽습니다. 특히 이번에 설명드릴 '서체의 분류'는 역사를 알지 않고서는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거든요. 저와 함께 간단하게 살펴보자구요.
2. 서체와 관련된 기본 용어에 대한 이해
가장 먼저 서체 기본 용어를 설명드릴께요. 프로젝트 진행 시 많은 클라이언트 분들이 '서체' 'Typeface' 'Type' 'Font' 등의 용어를 헷갈려하고 어려워하는데요, 특히 Typeface와 Font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동일시 하는 경우가 많아요. 디자이너가 "Typeface가...."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Font 말이죠?" 라고 되물으시곤 하거든요. 빠른 진행을 위해 같은 개념이라고 말씀드리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다릅니다.
개념적으로 보면 Typeface Cateory > Typeface > Font = Variants 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Typeface가 Font보다 더 큰 개념이고, Font가 모여 Typeface를 이룬다고 보시면 됩니다. 다만, 현대에는 Font가 컴퓨터 용 서체 파일을 지칭하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어서 일반인들은 Font=Typeface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실 현대인이 금속활자로 조판하거나, 기계식 타자기로 타이핑 할이 없잖아요? 다만 디자이너들은 구분해서 기억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전문가니까요!
Master Font는 일반인은 넘어가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전문 서체 디자이너나 접하는 단어이거든요.
서체의 Variants는 주로 디자인할 때의 폰트 옵션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특히 기울기는 Italic정도만 알고 있을텐데요, Italic이 아닌 정자체는 Roman이라고 불립니다. 이 명칭은 영문 서체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는데요, 동양인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죠? 좀 더 공통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Normal 과 Oblique인데요, Oblique라는 단어가 자주 접하는 단어가 아니어서 어렵게 느껴지더라고요. 엄밀히 말하면 Italic과 Oblique가 디자인 디테일이 좀 다르다고 하는데요, 여기까지는 너무 전문가 레벨이니 넘어가도록 합시다.
두께와 너비는 서체 패밀리에서 많이 보는 구분들이죠? 이 Variants들이 많을 수록 디자인 할 때 좀 더 풍부한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저도 과거 전용서체 개발 프로젝트 진행 시 비용 문제로 2가지 두께만 개발할 수 밖에 없었던 경험이 있는데요, 활용하는데 정말 제한적이더라고요. 워드나 아래아한글과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한정된 Variants를 가진 서체를 프로그래밍으로 Italic을 만들어 주거나 두껍게 만들어 주는 기능이 있는데요, 글자의 형태가 상당히 왜곡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가급적이면 오리지널 폰트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크기와 높이에 따른 Variants들은 일반적으로 접할 일이 많지 않고요, 서체 디자이너나 편집 디자이너 정도나 알고 있을 꺼예요.
자, 그럼 기본 용어를 살펴봤으니 본격적으로 서체를 분류하는 방법을 알아볼께요.
3. 역사에 따른 서체의 분류
서체의 역사는 고대로 올라갑니다. 최초의 영문 글자는 돌에 새긴 형태로 발견되었는데요, 여기서 Serif 서체가 왜 Classic한지 유추할 수 있어요.
돌에 글자를 새길 때 끌과 정을 사용하는데요, 현대 기술처럼 정밀할 수 없기에 불가피하게 글자 획의 마무리 부분에 삐침(Serif)이 생길 수 밖에 없어요. 즉, Serif 서체는 태생적으로 고대 로마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 후 인쇄 기술의 발전에 따라 좀 더 다양한 서체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영문 서체를 분류하는 명칭은 동양인으로서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워요. Venetian은 고대 로마 시대의 스타일을, Old Face는 에칭(동판을 긁은 후 부식시켜서 인쇄하는 방법) 기술을 사용하던 시대를, Transitional은 리소그래피(물과 기름의 반발을 이용한 인쇄 방법) 기술을 사용하던 시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Modern은 기계 인쇄가 시작된 시기인데요, 2023년 현재와 비교하면 전혀 'Modern'이 아닙니다만, 당시에는 굉장히 현대적인 기술이었기에 이런 명칭이 붙은 것이죠. 앞서 말한 Transitional이라는 용어도 Modern을 기준으로 정의된 단어예요. (Old Face와 Modern의 중간이란 뜻이죠!)
요즘 너무나 많이 사용되는 Sans-serif는 산업혁명과 함께 등장했다고 합니다. 삐침 없이 깔끔하게 마감되는 글자의 획이 인쇄 기술의 발전을 보여주고 있어요. 전체 서체의 역사 기준으로 보면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지닌 서체이지만, 그 종류와 다양함은 이미 다른 서체들을 뛰어넘었다고 봅니다. 아마 머지 않아 Sans-serif도 더 세분화되어 구분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미 왔을 수도! 제가 읽은 책은 10년 전 버전이니까요.)
4. 세리프에 따른 서체 분류
이 분류는 영어로 Thibaudeau Classification 라고 하는데요, 굉장히 읽기 어려운 이 이름은 1900년대 프랑스 인쇄공 '티바우두'가 분류한 기준입니다.
심플하게 세리프 형태에 따라 4가지로 구분하고 있어요.
5. 역사와 형태를 함께 반영한 서체의 분류
앞서 설명한 분류만으로도 서체의 다양한 디자인을 구별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또다른 분류 방법이 등장합니다. 이 역시 서체 역사가 Maximmilien Vox가 정립한데서 명칭을 따왔다고 합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분류라고 해요.
여기서 혼선이 오기 시작하죠? 같은 스타일의 서체인데 이름이 여러 개입니다. 저도 여전히 외우지 못하거니와 조금 비슷한 스타일은 구분이 잘 안되더라고요. 3번 역사에 따른 분류에 좀 더 개성이 두드러지는 4가지 스타일이 추가되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분류가 1960년에 채택되었으니, 약 100년 후에는 요즘 유행하는 서체들이 새로운 분류로 추가될지도 모르겠습니다.
6. 역사+형태+용도를 함께 반영한 분류
휴... 솔직히 이 분류는 분류가 더 많아져서 외우기 더 어렵습니다.
Vox 분류를 기준으로 서체의 용도, 즉 본문 용이냐 타이틀 용이냐 그래픽 정보 전달 용이냐에 따라 더 크게 분야를 나누고, Sans-serif 계열을 좀 더 세분화했습니다. 그래서 Vox+ 분류라고 불립니다.
1.9번은 브랜드비에서 자주 언급했던 서체 스타일이죠?
1.7번도 종종 사용되는 산세리프 서체인데요, 다른 분류에서는 Grotesque Sans로 불리기도 합니다. 현대인의 관점으로 보면 전혀 '그로테스크'하지 않은데요, 처음 등장했던 당시 기준으로는 충격적이었나 봅니다.
아래 2번과 3번 분류는 크게 의미가 없어서 이런 식으로 나뉘는구나 정도로만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추가로 4번 분류는 Non-Latin 글자체라고 합니다. 이건 생략해도 무방할 것 같아요.
이상으로 다양한 영문 서체의 분류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책이 10년 전에 발표되었고, 또 가장 대중적인 Vox 분류 역시 1960년대 기준이여서 현대 서체를 모두 포괄하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분류이니, 기본기를 다지는 데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또 추가로 검색한 바에 따르면(블로그링크 클릭), 국제타이포그래피연맹은 2021년에 기존 분류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분류법을 정립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적인 다양한 서체들이 구분할 수 있는 새로운 기준이 생길 것 같아 기대됩니다. (진정한 'Modern' 서체 카테고리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10년 전에 Letter Fountain을 읽었을 때도, 또 지금도 갖고 있는 생각은 '영문 서체는 영어 문화권의 디자이너가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서체 디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이 되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이고, 순수 동양문화권에서 성장한 디자이너가 이를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전용 서체 개발 프로젝트 시 영어와 한글 디자인을 분리해서 개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 우리나라에 영어로 된 브랜드 로고들이 많은데, 의외로 영문 서체의 기본기가 반영되지 않은 디자인이 꽤 자주 보여요. 서양인이 디자인한 한글 디자인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숙련된 디자이너일수록 영문 서체를 건드리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또 하나 추가로 말씀드리자면, 서체와 관련한 저작권 이슈 문의가 종종 들어오는데요, 서체의 역사를 이해하시면 저작권도 함께 이해하실 수 있어요.
간단히 설명드리자면, 서체 디자인 - 즉 글자의 형태에 대한 저작권은 없고요, 파일로서의 폰트에 대한 저작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Garamond 처럼 클래식한 서체는 옛날 글씨를 복각한 서체예요. 오리지널 글자체를 누가 디자인했는지(썼는지) 알 수도 없는데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또 미묘한 디테일로 달라지는 서체 디자인에서 식별력과 차별력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서체에 대한 저작권 판단은 디자인 유사성이 아니라, 해당 폰트 파일을 사용했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모든 제작물을 디지털로 디자인하는 현대에는 폰트 파일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로고 타입은 디자이너들이 일러스트레이터 등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직접 그리는 경우가 많아요. 따라서 로고에 사용된 서체와 인쇄 제작물 본문에 사용된 서체는 상표권과 저작권으로 개념을 달리해서 판단한다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PS. 위 내용은 Letter Fountain을 읽고 정리한 것으로, 제가 서체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잘못 이해했거나 오류가 생겼을 수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셨다면 알려주세요. 또, 서체 디자인은 서체 전문가에게 문의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