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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디자이너가 바라 본 한글

저는 비록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십여년 간 다양한 CI BI 프로젝트의 기획과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면서 생긴 하나의 원칙이 있어요. 그건 바로 한글 로고는 한국 디자이너에게, 영문 로고는 영문화권 디자이너에게, 한자 로고는 중국 디자이너에게 맞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특정 언어의 로고타입은 그 언어 문화권에서 나고 자란 디자이너가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해외 에이전시와 브랜딩 프로젝트 협업을 하면서, 그들이 개발한 한글 로고타입 및 한글이 들어간 활용 버전 어플리케이션 디자인을 직접 체험하면서 더욱 확신하게 되었죠. 이는 국내 유명 기업 및 브랜드가 해외 에이전시에 브랜딩 프로젝트를 맡길 때 항상 국내 브랜딩 에이전시를 보조적으로 함께 고용하는 이유이기도 해요. (다들 시행착오를 겪고 내린 결론입니다.)


브랜딩 경험이 별로 없는 기업의 경우, 조금이나마 비용을 아껴보겠다고 해외 에이전시만 단독으로 고용하기도 하는데요, 실무자 입장에서는 난감할 따름이죠.

도대체 왜, 어떤 디자인이길래, 제가 이렇게 단언해서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한글날을 맞아, 해외 브랜딩 에이전시가 진행한 한국 브랜드 프로젝트 속 등장하는 한글 디자인을 살펴보아요. 여러분들도 함께 보시면 한글 디자인을 해외 디자이너에 맡기면 안되는 이유를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1. 구찌



올해 초 패션브랜드 Gucci가 국내 한정판 디자인을 출시했죠. 스웻셔츠 한 장이 무려 320만원에 달한다고 하는데요, 이 디자인을 보고 아마도 모든 한국 사람들이 경악했을 것이예요. 각종 언론에서도 "짝퉁 아냐?" "합성 아냐?" "동묘에서 영감을 얻었나?" "지갑이 허락해도 머리가 허락하지 않는다" 등의 반응이었어요.

사실 '구찌' 한글 글자 디자인 자체는 문제가 없어요. 다만 컴퓨터 기본 폰트로 타이핑한 듯한 베이직 서체를 선택한 것이 한국 사람들의 기대치에 호응하지 못한 것이죠. 명품 브랜드 답게 특별하고 섬세한 디자인을 기대했을 텐데요, 한국 사람들이 흔히 접하는 기본 폰트 디자인으로는 전혀 특별함을 줄 수 없었습니다.

이 한정판을 디자인한 구찌 디자이너의 입장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 분은 Cool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비 한국어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으로서는 한글 서체의 미세한 차이를 구분하기는 커녕, 글자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니까요. 한글은 기본 조성 자체가 기하학적이어서 해외 디자이너들은 단순 글자 조합만으로도 그래픽적인 조형으로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구찌 디자인이 제가 말씀드린 해외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한글 로고타입 및 한글 어플리케이션 디자인의 가장 대표적인 결과물입니다.

다른 사례들을 더 살펴보면 확실하게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2. 강남치킨



Gangnam Chicken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한국식 치킨 전문점입니다. 사장님이 한국에 대해 잘 알고, 또 좋아하는 것 같아요. 월드컵 때는 한국 팀을 응원하기도 하더라고요. 다만 사장님은 디자이너가 아니기에, 디자인은 네덜란드의 브랜딩 에이전시 Tin Studio가 개발했습니다.

위 이미지에 있는 한글을 보면 미묘하게 어색하죠? 나름 디자이너가 단순 한글 폰트 타이핑에 그치지 않고, 조금 다듬은 것으로 보여요. 만약 한국 디자이너가 이런 결과물을 내놓았다면 디자이너의 자질을 의심받았겠습니다만, '외국인 버프' 덕에 용납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한글을 넣어 준 것이 어디야! 라며 말이죠.






3. 김씨네



'김씨네'는 한국인 유튜버가 대만에 런칭한 식품 브랜드예요. 유튜버 '찐쩐꾸(한국 이름을 중국어로 발음한 것입니다)'는 대만에 유학하면서 한국 사람에게 대만을 알리기 위해 유튜브를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한국 사람임에도 중국어로 영상을 제작하여 오히려 대만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고 해요. 한국 사람에게는 다소 생소한 유투버이고, 사실 저도 이 브랜드를 찾아보면서 처음 알게 되었어요. 위 이미지는 '김씨네'가 대만 편의점과 협업하여 출시한 삼각김밥입니다.

브랜드비가 팔로잉하는 Local Remote라는 대만 브랜딩 에이전시의 인스타그램에서 위 이미지를 봤을 때, 가장 먼저 한글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나름 한자와 비슷한 스타일의 한글 서체를 선택한 것은 매우 훌륭하나, 역시 자음과 모음의 밸런스가 미묘하게 어긋난 것 보이시나요? 아시아 문화권이라도 한글 디자인은 쉽지 않습니다.





4. ZVYK



또 다른 아시아 문화권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사례입니다. 위 패키지 디자인에 숨어있는 한글을 찾으셨나요? 힌트를 드리자면 고개를 왼쪽 90도로 꺾어보세요. 저도 처음에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가, 문득 '저 요상한 형태는 뭘까?'라고 호기심에 들여다보다 발견하게 되었어요.


ZVYK는 K뷰티 브랜드라고 하는데요, 한국이 아닌 해외에만 론칭한 브랜드인 것 같아요. 그래서 홍콩 디자이너에게 브랜딩을 의뢰한 것으로 추측되고요. 디자이너는 한국의 아이덴티티를 조금이라도 넣고 싶었나봐요. 다른 제품 패키지 디자인에도 뒷 면에 다소 생뚱맞은 한글을 넣었더라고요.


위 디자인에 들어간 한글은 디자이너가 한자 문화를 바탕으로 한글을 재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인으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글자 조형을 만들어냈죠.

아무리 인터넷을 통해 글로벌라이제이션이 되었다 하더라도 문화의 차이는 단숨에 뛰어넘을 수 없는 것 같아요. 특히 언어와 문자의 소통은 인공지능 번역기를 통해 원활해졌다 하더라도, 아름다움을 인지하고 판별하는 부분은 개개인이 태어나서 접해온 문화를 바탕으로 주관적으로 하기 마련이니까요.





5. 브링그린



'브링그린'은 올리브영의 PB 화장품 브랜드예요. 뉴욕의 Established라는 뷰티&패션 전문 브랜딩 에이전시에 이번 리브랜딩을 의뢰했는데요, 케이스 스터디에 무수히 많은 위와 같은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물론 실제 국내 커뮤니케이션에는 사용되지 않는 디자인 컨셉 표현을 위한 목업 이미지입니다.

저는 모순적 성향이 하나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디자인 사대주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시장을 타겟으로 한 브랜드가 한글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에는 오히려 반감을 갖게 되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외국 에이전시가 적극적으로 한글을 사용한 점은 칭찬할만하다고 할 수 있지만요(지금까지 해외 에이전시의 국내 브랜딩 사례에서는 한글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었거든요), 솔직히 위 이미지에 시뮬레이션한 티셔츠는 절대 입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저 '사철쑥'이 영어단어로 써 있었다면 아마도 스타일리쉬하다고 생각했겠죠?


위 디자인은 제가 경험한 해외 에이전시와의 협업에서 종종 봤던 어플리케이션 디자인들이예요. 한글 폰트를 찾아서 적용해 준 것은 참 고마운데... 뭔가 엉성하고 날 것(Raw)인 느낌이 있어서 실사용은 할 수 없었죠. 결국은 한국 디자이너가 새로 디자인해야만 했어요.





6. 지그재그



지그재그 역시 뉴욕의 에이전시 Porto Rocha에 리브랜딩을 의뢰했는데요, 위의 이미지는 케이스스터디에 업데이트된 목업 이미지입니다. '네 맘대로 사세요'라는 문구는 리브랜딩 전에 윤여정님 광고로 유명한 문구죠.

Porto Rocha는 이번 리브랜딩에서 단순 로고 디자인 뿐 아니라 사용해야 될 서체도 지정했습니다. 한글 서체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구글의 Noto Sans를 지정했는데요, Noto Sans는 완성도 있고 깔끔한 서체입니다만, 광고 등에 사용하기에는 다소 저항감이 있어요. 아마도 대부분의 한국인이 '디자인이 덜 됐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참고로, 아래는 실제 국내의 지그재그 브랜드 광고 이미지예요.



개인적으로 저는 지그재그 실무자의 고심을 느꼈다고 할까요? 브랜드 시스템으로서 Noto Sans 서체를 지정했는데, 그대로 적용하자니 왠지 덜 된 것 같고, 바꾸자니 새롭게 정립한지 얼마 안된 브랜드 체계를 거스르는 것 같고... 그래서 3D에 사이버틱한 메탈 질감을 추가한 것 같습니다. (주의! 100% 개인적 추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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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오징어게임'이나 K-pop의 인기로 해외에서도 한글을 인지하고 (그 전에는 이런 문자가 있는 줄도 몰랐으니 장족의 발전이죠!), 해외 디자이너들도 한글 폰트를 구분해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불과 몇 년 전만해도 해외 에이전시에 의뢰하면 '굴림체'의 디자인 시안을 받았었는데 이제는 Noto Sans가 적용된 디자인 시안을 받게 되는 수준까지 올라왔죠.

감개무량한 일입니다만, 이에 만족해서는 안될 일이예요. 해외 에이전시에 브랜딩을 의뢰하는 것이 단순 "해외 유명 업체가 디자인했다"는 허영심을 충족하고자 하는 이유가 아닌, 더 색다르고 특별하고, 더 완성도 높은 브랜딩을 위함이어야 하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해외 에이전시에게 국내 에이전시 수준의 한글 디자인을 요구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진상 짓이 될 테고요, 이를 위해서 반드시 국내와 해외 디자인의 진정한 협업이 이뤄져야 합니다.


기존의 협업은 해외 에이전시가 개발한 로고와 정립한 디자인 시스템을 전달받아 한국 에이전시가 '한글화'하는 일방적 프로세스였는데요, 앞으로는 로고 개발 단계에서부터 한국과 해외 에이전시가 협업하여 다양한 아이디어를 나누고, 서로 발전하는 프로세스가 되었으면 해요. 이는 브랜드비의 꿈이자 목표이기도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소통의 어려움은 핑계가 될 수 없어요. 번역기와 화상회의 시스템이 있잖아요. 좀 더 적극적이고, 좀 더 꼼꼼하게 매니징한다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글날을 맞아, 제 안의 디자인 사대주의를 다시 한 번 반성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허울좋은 말로 포장되는 디자인 국수주의를 지향하지는 않을께요. 선입견 없이 좋은 브랜딩을 판별하고, 또 해야만 하겠습니다.

2023 O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