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강연이 끝난 후 너무 졸려서 저녁도 먹지 않고 바로 잠이 들었습니다. 한국 시간으로 새벽 5시 정도였으니... 저의 시차적응이 망한 것은 둘째치고, 한국에서 라이브로 봤다면 진작에 포기했을 것 같아요. 현장이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다음 날은 미리 카페인을 단단히 충전하고 행사장으로 향했습니다.
위 이미지의 오른쪽이 둘째 날 일정입니다. 오전에 워크샵 등 별도 프로그램이 있었는데요, 체력 보존을 위해 당연히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날 발표자 중 네번째인 Bleed는 갑작스런 병으로 참석을 못하고 Ragged Edge의 발표로 대체되었습니다. 둘째날은 첫째날 대비 상대적으로 유명세가 덜한 발표자들로 구성되었기에 저는 Ragged Edge로 대체된 것이 오히려 더 좋았던 것 같아요. 다만 다른 참관객 역시 둘째날이 별로라고 생각했는지 전날에 비하면 많이 줄었더라고요.
How & How: brand values and narratives
둘째날의 처음은 런던의 에이전시 How&How가 열었습니다. 발표자인 Cat How는 LA에서 바로 날아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인지 시차적응을 못해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How&How 역시 설립한지 채 5년이 되지 않는 신생 에이전시임에도 무척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어요.
How&How는 Narrative, 즉 브랜드 스토리텔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안타깝게도 예시로 든 사례들이 이미 How&How 웹사이트에서 봤던 것들이라 개인적으로 아쉬웠어요. 저처럼 케이스 스터디 열심히 읽어보는 사람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How&How를 잘 몰랐던 분들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웠을 것 같네요.
추가로 프리젠테이션 슬라이드가 너무 예뻐서 '역시 다르긴 다르군'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획자의 관점에서 이런 것이 인상에 남더라고요.)
Studio de Ronners: Cultural branding excellence
Studio de Ronners는 이번 컨퍼런스를 통해 알게된 에이전시인데요, 네덜란드의 디자인 에이전시로 주로 예술문화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창립자의 성이 Ronner입니다.
다양한 사례 중 네덜란드 디자이너 협회 브랜딩 사례가 인상적이었는데요, 어떻게 보면 브랜드비와도 결을 같이 하는 단체이기도 하고, 브랜딩을 전단지 디자인에서 시작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어요. 노후화된 협회의 정체성을 개선하기 위해 "왜 디자이너들이 이 협회에 가입해야 하는가"를 정의하고, 이를 직관적으로 전단지에 반영한 것이죠. (위의 이미지가 바로 그 전단지 디자인입니다.) 앞서 발표한 How&How와 같은 포트폴리오 소개 중심 발표였지만, 저에게는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라 재밌었고, 또 에이전시의 6가지 원칙과 함께 정리해서 발표했기에 쏙쏙 잘 들어왔던 것 같아요.
FIELD: technology-driven design
다음 발표자인 Field 역시 제게는 생소한 에이전시였는데요, 테크 기반의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입니다. 일반적으로 테크 기반 에이전시라고 하면 웹, 인터랙션 디자인 또는 모션 그래픽 에이전시를 연상하게 되는데요, Field는 조금 결을 달리하는 에이전시였어요.
Field가 소개한 나이키 인텔리전트 리테일 시스템 프로젝트의 경우, 전 세계 각국의 나이키 매장 내부의 다양한 디스플레이 환경에 일관되게 적용 및 보여지는 디자인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었는데요, 디자인 에셋을 구축해 놓으면 개별 매장에 맞게 바로 적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공간 디자인의 경우 멀티미디어 디스플레이를 설치하는 것도 일이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각 디스플레이에서 운영되는 영상 제작 및 적용이예요. 크리에이티브한 멀티미디어 영상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매번 그 영상을 각종 디스플레이 사이즈와 환경에 맞춰 변경해야 하니까요. 브랜드 관리자의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디자인 시스템이 아닐까 싶습니다.
Ragged Edge: rule-breaking design for changemakers
다음은 원래 예정되어있던 Bleed 대신 대타로 발표한 Ragged Edge였는데요, 대부분 디자이너가 발표한 다른 세션과 달리 전략과 카피라이팅 담당이 발표자여서 그런지 제 머리 속에 쏙쏙 잘 들어오더라고요. 틱톡,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 미디어, 그리고 생성형 AI 등 최근 트렌드는 "Creative"라는 키워드에 역설적으로 모두가 같은 것을 반복하고 비슷비슷해지는 평준화의 시대를 만들고 있고, 이런 환경에서 브랜딩으로 어떻게 차별화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Dinamo: humor and insights
Dinamo Type Foundry의 발표는 위 이미지가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약간 촌스러운 느낌의 슬라이드 디자인에 A부터 Z까지 이야기한다기에 처음엔 정말 졸리겠다고 생각했었어요.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ABCDEFG 노래를 부르며 카운팅만 하고 있을 것 같았죠. 그런데 웬걸요, 말그대로 두서없는 발표인데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핑거보드(손가락으로 미니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것)에 몰입했던 이야기에서부터 글로벌 기업과 전용서체 개발을 진행했던 경험담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유머로 가득해서 계속 깔깔대며 웃었어요. 간간이 폰트 산업에 대한 인사이트를 엿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습니다.
Tomcsányi: post-socialism's influence on fashion
Tomcsanyi는 헝가리의 패션 디자이너로, 개최지이자 호스트의 정체성을 담은 발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Tomcsanyi는 헝가리의 전통문화를 반영한 패턴 디자인이 특징인데요, 한글을 주제로 다루는 우리나라의 이상봉 디자이너와 비슷한 결이라고 생각되었어요. 다만 헝가리의 역서와 문화를 전혀 모르는 외국인에서 입장에서 보니... 솔직히 잘 공감이 되지 않았어요. 차라리 헝가리의 디자인 에이전시를 소개했으면 어땠을까 조금 아쉬웠네요.
Anna Kulachek: global design influence
Kulacheck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입니다. 몰랐는데 엄청 유명한 분이었더라고요.
단순화된 기하학 그래픽과 화사한 색감이 특징인 디자인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틀 간의 발표자 중 유일한 여성 디자이너였는데요, 물론 작품들도 다 예뻤지만, 개인적으로 그녀의 스타일리시한 퍼스널리티가 기억에 많이 남았어요.
Kurppa Hosk: Merging strategy and design
컨퍼런스의 마지막은 최근 북유럽 디자인을 대표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Kurppa Hosk였습니다. 역시 무척 기대했던 발표였는데요, 너무 기대를 많이 했던 탓일까요? 생각보다는 임팩트가 적어서 다소 아쉬웠습니다. 음악과 디자인의 공통점을 주제로 발표했는데, 다소 연세가 있으신 Kurppa님의 약간 클래식한 관점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연륜있는 거장 디자이너가 직접 발표하는 모습은 너무 좋았어요.
둘째 날의 발표는 첫째 날 대비 만족도가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습니다. 일단 첫째 날의 경험으로 기대치가 더욱 높아진 헤드라이너들의 발표가 다소 제 기대에 부합하지 못했던 이유가 가장 큰 것 같고요, 또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성향의 제게는 디자이너들의 '아티스트'로서의 관점이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둘째 날의 개인적 탑3를 뽑아보자면 Ragged Edge, Dinamo, de Ronners 입니다.
이틀에 걸친 행사 종료 후에는 POV 스탭들의 무대 인사와 함께 내년에 POV 2회차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비록 모든 티켓이 매진되지는 않았지만 약 600석 규모의 강연장이 거의 채워졌고, 온라인 티켓 구매자도 약 200명에 달했다고 해요. 티켓 가격을 통해 대략적인 매출을 가늠해 볼 수 있는데, 대관료나 발표자 섭외비 등을 생각하면 적자가 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운영적인 부분에서는 다소 미흡한 부분이 보였지만, 이렇게 많은 다양한 국가, 다양한 전문성을 가진 디자인 에이전시들이 한 자리에 모여 발표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은 정말 고맙고, 또 칭찬합니다.
경험을 토대로 한 참관 팁을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미리 도착해서 시차 적응을 해 놓아라 : 시차 적응 기간은 개인마다 다를텐데요, 저는 하루 정도 여유를 뒀음에도 부족했습니다. 방대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깨어있는 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모든 강연을 다 들으려고 하지 말아라 : 처음에는 빡빡한 스케쥴을 원망했었는데요, 생각해 보면 개인이 임의로 취사선택하여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었어요. 비록 저는 비싼 돈과 시간을 들여 먼 부다페스트까지 왔으니 아깝지 않게 다 들어봐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 실패했지만요. 체력의 한계로 집중도가 떨어져서 정말 좋은 강의였는데 생각이 잘 안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는 것보다는 경험의 밀도 측면에서 더 낫지 않나 싶습니다.
- 네트워킹의 목표를 설정하라 : 스몰톡에 실패한 저로서 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모순이지만, 현장 참관의 가장 큰 장점은 네트워킹이라고 생각해요. 막연히 현장에서 인연이 닿기를 기대하기 보다는 "우리 회사의 인스타그램을 소개해야겠다" 라던가 "팬이었던 발표자의 사인을 얻겠다" 등의 작은 목표를 가지고 움직였다면 좀 더 보람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저는 옆자리에 앉은 바이킹 청년과 쉬는 시간에 잠깐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덕분에 라트비아에 있는 브랜딩 에이전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커뮤니케이션 역시 큰 에너지를 소비하는 행위이기에 위 1,2번이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 결국은 체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POV와 같은 전세계 브랜딩 에이전시들이 참석하는 행사가 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또 만약 브랜드비가 주최한다면 어떤 모습의 행사여야 할지 그려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열심히 성장해서 브랜드비 주관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싶네요! 많은 도움과 응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