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ntagram은 브랜딩 에이전시 중 전설적인 회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2022년은 Pentagram이 창립 50주년을 맞은 해였는데요, 이를 기념하여 <Pentagram : Living by Design> 이라는 책자를 발간했습니다.
작년 10월 중순부터 Pre-order를 받았는데요, 브랜딩 & 브랜딩 에이전시 정보를 다루는 사이트를 운영하는 저로서 꼭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만, 언제 받을지 모르는 미리 주문이라는 것과 180파운드(우리돈으로 약 30만원)이라는 가격이 조금 망설이게 했습니다. 그래도 과감하게 주문을 했던 건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어요.
사실 꽤 오래전에 Hornall Anderson이라는 브랜딩 에이전시가 30주년을 맞아 책자를 발행했었는데요, 개인적으로 일면식도 없지만 막연한 팬심이 있었던지라 살까말까 꽤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해외배송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았기에 주문하고 통관하는 방법이 까다로웠고, 그냥 막연히 누군가 수입해서 팔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보류를 했죠. 그런데... 그 회사가 이제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2020년에 광고대행사 Sid Lee에 흡수합병되어 더 이상 그 이름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죠. 한동안 브랜딩 에이전시가 아닌 일반 기업에 몸을 담아 업계를 떠나있었는데요, 호기심에 찾아봤다가 웹사이트가 사라지고 이름이 바뀐 것을 보고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몰라요. 그리고, 그 때 책을 구입하지 않은 것을 무척 후회했죠.
<Happy Accidents - Hornall Anderson: Three Decades of Design and Discovery>
구매욕을 불러일으켰던 책자에 포함된 USB 메모리
물론 Pentagram이 당분간 문을 닫을 일은 없어 보입니다만, 당시 Hornall Anderson이 사라질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던 건 마찬가지였기에 이번엔 과감히 구매를 결정했죠. 그리고 1000권 Limited Edition이라는 것도 가심비의 명분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긴 기다림 끝에 이번주 월요일, 약 5개월 만에 실물을 받아보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렵게 구한 물건일 수록 받았을 때 기쁨이 크고, 주변에 자랑하게 되는데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저는 DHL로부터 책자를 받아오는 순간부터 현타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50년 역사의 무게 = 5Kg
책이 두꺼울 것이라는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 무거울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배송 주소지 상에 문제가 있어 직접 DHL 사무소에 가서 찾아왔어야 했는데요, 쇼핑백도 노끈도 제공하지 않는 매정한 서비스에 5Kg의 박스를 끌어안고 이동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무슨 책을 이렇게 무겁게 만들었나? 숫자 5를 좋아해서 무게도 그것에 맞춘 건가? 5Kg 짜리 5권이 아닌 것을 감사해야 하나?
이 때 부터 구매한 것이 좀 후회가 되었어요.
두께를 보세요! 거기다 밀도 높은 종이로 제작해서 각각 3Kg, 2Kg 무게가 나갑니다.
핑크색 책은 Pentagram의 역사와 분야별 실적을, 회색 책은 Pentagram의 파트너들 - 총 50명(현직23명 포함)의 포트폴리오를 담고 있어요. 내용도 꽤 알차게 구성되어 있어 단순히 그림책 보듯 보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저를 반성하게 했습니다. 다만, 여기서 두 번 째 현타가 온 것입니다.
책이 너무 무거워! 페이지가 너무 많아!!!
너무 무거워서 절대 한 손으로 들고 볼 수가 없고, 책상에 펼쳐 놓은 후 정독을 해야 하는 책입니다. 또 종이로 만든 책이기에 번역기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시큰한 손목을 잡고 훑어보면서 '언제 이걸 다 읽어보나...'라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오더군요.
포트폴리오 위주의 그림책일 것이라고 생각한 저의 큰 오산...
물론 위와 같은 그림 페이지도 있습니다.
The Biography : 50년 동안의 업적
단단한 하드커버의 핑크색 책자 <The Biography>는 Pentagram의 역사와 분야 별 업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책의 커버는 출판사 사이트에 따르면 3가지 색상의 랜덤 제작인 것 같아요. 제게 온 것은 핑크색입니다.
50년의 역사는 정말 대단한 것이예요. 우리나라의 브랜딩 역사는 대략적으로 88올림픽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즉, 우리나라의 1세대 브랜딩 에이전시들 중 가장 오래된 기업도 40년이 채 되지 않은 것이죠. 또 그 오랜 시간 동안 Pentagram 처럼 꾸준히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에이전시도 매우 드뭅니다.
이렇게 보면 3Kg, 656페이지에 50년의 역사를 담은 것이 엄청나게 압축된 셈입니다. 아마 작가는 책을 더 두껍게 만들 수 없음을 한탄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하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기왕이면 좀 더 압축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내용이 너무 방대해서 진도가 잘 안나가더라고요. 여기서 세 번째 현타가 왔습니다.
사실 난 Pentagram의 열렬한 팬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공부해야 하나?
Pentagram은 브랜드비가 만들어 나가고 싶은 브랜딩 생태계, 에이전시가 끊임없이 지속하고 발전하는 모습의 롤 모델이긴 합니다. 그래서 Pentagram의 50년 역사가 궁금했던 것이고요. 하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알아가야 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저는 책을 단숨에 읽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 차근차근 꾸준히 읽는 것을 조금 힘들어 합니다. 마음을 누르고 있는 숙제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래도 기왕 구매했으니, 가능한 한 빨리 모두 읽어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The Directory : 50명의 내노라하는 디자이너들
Pentagram의 독특한 운영방식은 익히 알고 계시죠? (모르신다면 브랜드비가 작성한 지난 글을 읽어보세요 > 따로 또 같이, Pentagram)
두번 째 권, 회색의 <The Directory>는 Pentagram을 거친 과거 및 현재의 디렉터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총 50명의 파트너 디자이너가 있었는데요, 개개인을 소개하고 디렉팅한 작품을 정리해 놓았어요.
50년 동안의 Pentagram 파트너들 변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도표
이 파트너 디자이너들은 독립적으로 에이전시를 차렸어도 충분한 전문성과 유명세를 갖고 있기에, 개개인 별 포트폴리오도 그 양이 꽤 됩니다. The Directory는 736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전부 수록하지는 못했을 거이예요. 그래서 왠지 한 분 한 분 씩 꼼꼼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와 동시에 네 번 째 현타가 온 것입니다.
50명이나 되는 해외 디자이너보다도,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제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 디자이너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요. 그 원인에는 독립적이고 폐쇄적인 성향이 강한 에이전시의 특성도 있고, 제가 디자이너가 아니다 보니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는 한 만날 일이 거의 없더라고요. 미디어나 인터뷰 기사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는 것이 다였죠. <The Directory>를 보면서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반성했습니다.
End Matter : 50년 동안 같이 일했던 모든 사람들
<The Directory>의 마지막 부분은 그동안 사람의 이름으로 빼곡히 채워져있어요. 50년 동안 같이 일했던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것이죠.
솔직히 여기에서 무척 감동했어요. Pentagram은 웹사이트에서 프로젝트 디렉팅을 한 파트너의 이름 뿐 아니라 모든 참여자들의 Credit을 꼼꼼히 적는 몇 안 되는 에이전시거든요. 50년 전 부터 크리에이터의 Credit을 중시해왔기에, 이 페이지들을 채울 수 있었을 것이예요. 역사가 오래될 수록, 규모가 클 수록 거쳐간 사람들을 기록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몇 장 안되지만(총 1400여 페이지에 비하면 정말 적은 수지만) 추가 페이지를 할당한 것도 정말 훌륭한 기업 문화라고 생각해요.
저도 브랜드비를 운영하면서 앞으로 만나게 될 브랜드 크리에이터들을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혹시 알아요? 브랜드비 50주년 책자를 편찬할 미래가 올 수도!
구매 후기를 마무리하며...
Pentagram이 이 책자를 만들기 위해 무려 5년(!!!)이 걸렸다고 해요. 일부러 숫자를 맞춘 것이 아닐까 살짝 의심했습니다만... 직접 실물로 보니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록 제가 내용이 너무 방대하다고 투덜대긴 했지만, 정말 알차게 구성되어 있어요. Pentagram이라는 회사에, 그리고 브랜딩 업계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충분히 값어치를 하는 책입니다. (단, 5Kg의 무게는 버텨내야 합니다.)
Ps 1.아마 대한민국에 이 책을 구매한 사람은 저 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원래는 관심있는 분께 대여도 하려고 했으나... 제가 아직 다 못 읽은 관계로 한참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대여 예약은 받을 수 있어요!
Ps 2 . 1000셋트 한정판이지만, 책자에는 표기가 되어 있지 않아요. 예술작품처럼 넘버링을 했다면 좀 더 소장가치를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살짝 아쉬운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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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Pentagram: Living by Design 구매 사이트(현재 모두 판매되어 구매는 어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