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CI, BI 등 브랜드 디자인을 할 때 모션 그래픽은 거의 필수 요소가 된 것 같습니다. 유튜브, AR, VR 등을 통해 영상매체에 익숙해진 현대인에게 평평한 2D 화면에 정지된 로고 디자인은 그다지 흥미를 끌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겠죠? 슬라이드 영사기 또는 OHP로 프리젠테이션 하던 시대를 거쳐 파워포인트의 애니메이션만으로도 최신 감각을 뽐냈던 저로서는 (또 나왔다! 라떼 시절) 엄청난 간극인데요, 그래서 2D에서 3D로, 또 정적(靜的)에서 동적(動的)으로 변화하던 시기에 나타난 선구자적인 디자인 에이전시는 특히 잊혀지지 않는 것 같아요. 저의 최애 브랜딩 에이전시 중 하나인 SomeOne이 그렇구요, 오늘 소개드릴 Moving Brands 역시 그러합니다.
1. 영상과 테크놀로지를 DNA로 지닌 브랜딩 에이전시
Moving Brands는 1998년 디자인, 필름, 스토리텔링, 그리고 테크놀로지에 관심을 가진 다섯 명이 설립한 디자인 에이전시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글로벌 디자인 에이전시와의 차별점이 보이죠? Moving Brands라는 사명 역시 에이전시의 정체성을 표현합니다.
Moving Brands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성하는 요소가 그래픽 뿐 아니라 사운드, 모션, 텍스처 그리고 감성(Emotion)까지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혁신적인 디자인 방식으로 이를 보여줬습니다. 제가 Moving Brands라는 회사를 알게된 건 2007년인데요, 당시 저와 같은 브랜딩 업계 종사자들은 혜성처럼 나타난 이 디자인 에이전시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너나 할 것 없이 따라하려고 노력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너무나 유명해서 누구나 다 알 것 같은 에이전시여서 굳이 소개해야 하나?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브랜드비 구독자 중에는 MZ 세대도 있을 것이라 보고 Moving Brands의 대표 프로젝트들로 간단히 설명드릴께요.
2. 대표 프로젝트 하나. Swisscom (2007년)
이 움직이는 심볼 디자인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시간이 꽤 흘러서 잊혀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Swisscom은 스위스의 대표적인 텔레콤 기업인데요, 2007년에 새로운 CI를 발표했어요. 2007년은 막 아이폰이 탄생했던 시기로서 아직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지는 않았었기에, 텔레콤 기업은 가전회사와 함께 IT 카테고리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었죠. 무수히 많은 앱 서비스와 클라우드, SaaS, AI, Blockchain 등 엄청나게 다양해진 요즘의 IT 분야와 비교하니 정말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SK텔레콤이 독일의 도이치 텔레콤을, KT는 영국의 BT를 벤치마킹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는데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던 Swisscom이 이 획기적인 로고 디자인으로 단숨에 유명세를 얻게 됩니다.
얼핏 보면 추상적인 아트 오브제 같은 심볼 디자인의 진면목은 바로 모션 그래픽에서 나타납니다. 그라데이션을 통해 3D 느낌을 준 것이 아니라 디자인 설계 자체를 3D 기반에서, 모션 그래픽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죠! 지금은 3D가 보편화되었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몰라요.
이렇게 복잡하고 추상적인 형태를 3D로 구현하고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사용하는 툴은 2D기반인데요, 단순히 생각하면 3D 툴 사용법만 배우면 되는 것 아니야? 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제 경험에 미뤄보면 쉽지 않더라고요. 현재까지도 많은 브랜딩 에이전시들이 별도의 3D 디자이너,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를 채용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먼저 완성된 2D로고를 던져주며 3D로 변환해달라고 하는 것과, 디자인 개발 초기부터 그래픽 디자이너, 3D 디자이너,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가 함께 참여한 프로젝트는 완성도가 다릅니다.
3. 대표 프로젝트 둘. Mindshare (2008년)
Swisscom의 후속으로 발표된 Mindshare 역시, 당시에 무척 신선한 디자인이었어요. Mindshare 심볼 역시 모션 그래픽이 들어가 움직이는데요, 지금은 Mindshare의 CI가 변경되어 움직이는 로고 파일을 찾을 수가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눈썰미 좋으신 분들은 수많은 아류 로고 디자인을 보신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Mindshare는 미디어 에이전시인데요,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하고 난해한 비즈니스 카테고리와 추상적 개념의 사명을 두 개의 움직이는 원으로 표현한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역시 Moving Brands!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죠.
4. 대표 프로젝트 셋. HP (2011년)
역시 너무나 유명한 HP 로고입니다. 사실 이 HP 로고는 스토리가 깁니다.
Moving Brands에 의뢰가 들어온 것은 2008년이라고 하는데요, 아마도 Swisscom과 Mindshare의 브랜딩이 워낙 유명세를 타서 HP가 연락을 한 것 같아요. 무려 2년의 개발 기간을 거쳐 2011년 이 파격적인 로고가 발표되었을 때 의견이 분분했어요. HP는 워낙 유명하고 충성고객이 많은 브랜드였기에, 변화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죠. 특히 가독성을 문제삼아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했어요. 결국 HP는 이 로고 디자인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렇게 전설 속 디자인으로 남겨지나 싶었는데, 왠걸요? 2016년에 HP가 프리미엄 제품에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공식 CI로 채택이 됩니다. 이와 관련한 인터뷰(링크 클릭)를 읽어보면 Moving Brands의 디자인이 너무 시대를 앞서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HP가 2011년도에 채택하지 않은 이유는 조직 내부가 어수선하여 혁신적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항상 느끼지만 브랜드의 변화는, 그 브랜드가 인지도가 높고 대중적일 수록, 변화의 정도가 클 수록 더욱 격렬한 반발을 일으키기에 참 어렵습니다. 또, 과연 그 디자인이 옳았느냐 라는 것은 어느정도 시간이 흘러야 증명되기에 파격적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어지간한 자신감과 배짱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봐요.
5. Moving Brands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최근 프로젝트
HP 이후로도 수많은 유명 브랜드의 브랜딩 작업을 했지만, 개인적으로 Moving Brands만의 개성이 많이 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훌륭한 디자인이지만 다른 브랜딩 에이전시의 포토폴리오에서도 볼 수 있는 것들이었거든요. 처음의 감동이 너무 커서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아진 탓일까요?
그나마 최근에 Moving Brands의 정체성이 엿보이는 프로젝트들이 눈에 띄고 있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5개를 선정해 봤어요.
eir (2015년)
eir는 아일랜드의 텔레콤 & 방송 기업입니다. 역시 3D 기반으로 디자인된 로고예요.
Evercast (2021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심플한 심볼 디자인이지만, 진가는 영상과 디자인 시스템에서 드러납니다.
GP (2022년)
브랜드비가 2022년 트렌드로 꼽았던, 일명 '뺑돌이' 심볼인데요, 로고 애니메이션을 보면 왜 이 형태를 갖게 되었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존 로고를 계승하면서도 더 완성도가 높은 디자인을 보여주고 있어요.
Mighty Buildings (2022년)
심볼 디자인만 봐도 직관적으로 어떤 기업인지 알 수 있겠죠? 3D 프린팅 기술로 공간을 만드는 기업입니다.
Evisort (2023년)
보자마자 너무나 Moving Brands 스러운 디자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역시 감탄이 나오는 모션 그래픽입니다.
이상으로 Moving Brands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이름과 기업의 정체성이 딱 맞아 떨어지는 브랜딩 에이전시죠?
또, 제가 Moving Brands를 흥미롭게 보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요, Moving Brands는 런던, 취리히, 뉴욕, 샌프란시스코 총 4개의 오피스를 운영하고 있지만 모든 프로젝트가 지역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투입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글로벌 대형 브랜딩 에이전시들이 지역 별 독립 오피스로 운영되고 기업 브랜드 네임만 공유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Moving Brands는 COVID19 이전에 원거리로 글로벌 협업하는 모델을 구축했다니 대단합니다.
개인적으로 Moving Brands의 일하는 방식이 너무 궁금한데, 언젠가 인터뷰 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브랜드비가 충분히 유명해지고 브랜드 파워가 생겨야 할텐데 말이죠!